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소포타미아 문명 (문단 편집) == 군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Exhibition_I_am_Ashurbanipal_king_of_the_world,_king_of_Assyria,_British_Museum_(31033563287).jpg|width=100%]]}}} || || '''{{{#E4C77E '세계의 왕' [[아슈르바니팔|{{{#E4C77E 아슈르바니팔}}}]].}}}''' || 인간 사는 곳이 다 그렇듯이 부족 간의 싸움이나 다툼 정도는 [[구석기]], 그전부터도 빈번히 일어났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규모 전투나 국가간 전쟁은 [[우루크 시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기원전 3700년 경에 시작된 우루크 시대에 거대한 도시국가들이 등장하고 서로 간의 영역다툼이 체계화되며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시국가들은 도시를 높은 성벽으로 둘러치기 시작했고 우바이드 문명권의 수많은 도시, 마을들이 버려지거나 약탈당했다. 전쟁 자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3700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원전 2500년 전까지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젬데트 나스르 시대]]를 거쳐 [[초기 왕조 시대]] 들어서는 전쟁 자체가 위대한 행위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전쟁 기록석판들이 등장한다. 수메르의 전쟁 관련 기록들 가운데 가장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건 초기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독수리 석비'다. 라가쉬의 왕 에안나툼이 인근 도시 움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석비로 이름은 석비에 새겨진 독수리 부조에서 따왔다. 석회암 한 판에 새겨졌지만 현대 남은 건 7개의 조각들 뿐이고 그마저도 19세기에 [[프랑스]]로 반출되어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에안나툼 왕이 창을 꼬나쥔 [[팔랑크스]]를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들의 잘린 목이 바닥에서 나뒹굴며 위에는 독수리들이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배회한다. 또한 [[전차]]를 타고 창을 든 모습의 에안나툼 왕의 모습도 등장한다. 당대 수메르의 전쟁 모습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사료적 가치가 높은 유물. 각종 도시들이 난립하던 초기 왕조 시대에는 전쟁이 곧 외교의 일부였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왕은 전쟁 영웅일뿐더러 곧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두 도시가 싸우면 그 사이에 있는 중립 도시가 중재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고 뒤통수를 치고 또 싸움을 벌이는 일의 끊임없는 반복이었던 것. 도시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아서 기껏해야 인근의 도시들과 치고받는 일이 고작이었다. 보통 출정 후 며칠 안에 전투를 벌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판이 났다. 대부분이 소규모 국지전에 그쳤고 몇천 ~ 몇만명이 부딪히는 전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초기 왕조 시대 이후 메소포타미아 일대가 지속적으로 통합되며 제국이 들어서자 나중에는 도시간 전쟁보다는 외부세력 간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온다. [[아카드]]와 [[고바빌로니아]],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등의 왕궁에는 전쟁의 영광을 기리는 벽화들이 곳곳에 가득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4e11385e12952ff8e08bc95abd4ded5.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df839fe89b90c1912c02a16bc785e84.pn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e52fba4c8055a72ffff812dffffe415.jpg|height=300]]}}} || || '''{{{#E4C77E 아시리아 군대의 모습}}}''' || '''{{{#E4C77E 수메르 보병}}}''' || '''{{{#E4C77E 수메르 전차병}}}''' ||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상당수가 [[청동기]]나 [[철기]] 무기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도끼]], 5피트에 달하는 기다란 [[창]], 주력용 철제 검, 보조용 [[단검]],[* 적군이 가까이 오면 목을 베거나 찌르기 용도로 가지고 다니던 철제 단검이었다.] [[재블린]], [[슬링]] 따위로 무장했다. [[갑옷]]도 입었다. 두드려 만든 동판을 망토나 옷에 붙여 몸을 보호했고 청동으로 만든 갑주를 쓰기도 했다.[* 재현한 결과 이런 갑옷은 거의 9kg에 달했다. 9kg에 달하는 무게의 갑옷을 만들 청동은 매우 값비쌌으므로 아무나 입고 다닐 수 없었다. 보병들을 묘사한 대부분의 부조를 봐도 보병이 이런 청동갑옷을 입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돈이 없거나 비싼 갑옷을 살 경제적 역량이 안되는 사람들은 그냥 가볍게 옷만 입고 다니기도 했다. 반면 최고 지위를 누리던 왕은 [[황금]]을 얇게 두드려 펴서 만든 다음 그 안에 부드러운 리넨을 덧댄 투구를 썼다. 기동성이 생명이던 경기병의 경우 평범한 옷에 깃털 장식 정도를 더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경기병들은 보통 궁을 써서 주력 군대를 지원했다. [[사르곤]]의 [[아카드]] 제국 이전까지는 평범한 단궁을 사용했지만 사르곤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합성궁을 퍼뜨린 이후부터는 훨씬 더 강력한 성능의 합성궁이 주류가 되었다고. 아마 [[유목민]]들이 쓰던 합성궁을 사르곤이 그 위력을 깨닫고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정거리는 약 250~650m. [[전차]]를 사용하는 전차병들도 있었다. 전차라기에는 초기적인 형태에 그 성능도 조악했으나 어쨌든 전차는 전차였다. 하지만 당시 고대 전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빠르고 파괴력이 강해서 나름 엘리트 병종이었고, 말을 탄 기병이 등장하기 전에는 전령 역할도 했다. 전차보다 훨씬 빠른 말이 등장한 후인 기원전 700년대에는, 전령에서는 아예 제외되고 전투 목적으로만 쓰이게되지만 그 파괴력은 여전했기에 4인승으로 개량되기까지 했다. 보통 기수 1명, 전사 1명이 타고 다니는 2인승 전차가 대부분으로 [[당나귀]], [[노새]] 등이 끌었다. [[말(동물)|말]]은 기원전 2000년대 들어서야 보급되었다. 하지만 말은 보급된 이후에도 전차에 많이 쓰이지는 못했는데, 그이유는 지나치게 비쌌기 때문. 말이 하도 비용이 많이 들어서 전차에 쓰기보다는 왕족이나 장군들이 직접 타고다니거나 더 유용한 목적으로 많이 썼다. [[신바빌로니아]]와 신아시리아 제국은 유난히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약탈을 하거나 아예 적대 도시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중에서도 신아시리아 제국은 전 메소포타미아에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군사적으로 악독한 짓거리를 벌이고 다녔다. 신아시리아는 피정복민들을 다루기 위해 일부러 기존 도시를 싸그리 불태운 다음 원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강제이주시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했다. 그나마 신바빌로니아 왕들이 웬만하면 도시를 불태우지는 않았고 피정복민들도 [[바빌론]] 지방의 부족한 인구를 채우거나 노역 작업을 제외하면 강제이주정책도 실시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신아시리아의 피정복민 정책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수 있는 부분.[* 하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기원전 604년 아쉬켈론을 불살랐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신바빌로니아가 아예 이런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디까지나 '신아시리아에 비하면' 조금더 온건하다는 것 뿐이다. ] >나는 그들의 전사 3,000명을 칼로 쓰러뜨렸다. 나는 그들에게서 포로와 소유물과 소와 가축을 빼앗아 왔다. 나는 사로잡은 수많은 포로들을 불태웠다. 나는 수많은 병사들을 산 채로 사로잡았고 어떤 자들은 팔과 손을 잘랐다. 나는 그들의 코, 귀, (그리고) 사지를 잘라내었다. 나는 많은 병사의 눈을 도려내었다. 나는 살아있는 자들의 더미, 그리고 잘린 머리들의 더미를 하나 만들었다. 나는 그들의 머리를 도시 주변의 나무에 매달았고 적들의 소년소녀들을 불태웠다. 나는 도시를 파괴하고, 파괴하고, 불태우고, 먹어치웠다. > >[[아시리아|신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메소포타미아의 너른 평원 일대는 농경에는 최적이었지만 반대로 방어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었고 아시리아는 그 누구보다 이 지혜를 유용하게 터득한 세력들 중 하나였다. 아시리아는 가혹한 전술로 사람들을 압박하는 심리전을 썼다. 일단 아시리아는 자신들에게 항복하면 어느 정도는 봐주었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아예 도시를 싸그리 불태웠다. 불태운 도시에서 도망쳐온 난민들은 외국 땅으로 강제이주시켜 황무지를 개간토록 만들었다. 한꺼번에 다 보내는게 아니라 조금씩조금씩 나누어 소규모로 보냈기에 그 곳에서 단합해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기껏 새로 이주해간 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해놔도 아시리아인 총독이 대부분의 생산물을 빼앗아갔기에 정말 비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744년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이란에서 아시리아-바빌로니아 국경으로 65,000여 명을, 기원전 742년에는 동부 자그로스 산맥으로 30,000여 명을, 기원전 721년에는 사르곤 2세가 27,290여 명을, 기원전 707년에는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108,000여 명을, 기원전 703년에는 센나케립 왕이 [[바빌론]]에서 208,000여 명을 추방했다. 이외에도 소규모로 끊임없이 강제추방, 이주를 시켰던 걸 생각해보면 최소 '''수십만 명'''을 강제추방시켰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포로들을 자비없이 죽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위의 기록을 봐도 알겠지만 이 인간은 포로들에게 관대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반군들의 껍질을 벗기고, 창에 찌르고, 참수시키고 산채로 화형시키는 일을 즐겨했다. 사람들을 절단해 죽이는 일은 예사였고 머리와 팔, 손, 입술 따위를 자르고 벗겨 성벽 아래에 널부러뜨리는 일도 많았다. 코를 잘라 흉측해진 모습의 머리를 잘라 망대에 꽂은 다음 성벽 위에 주렁주렁 전시해놓기도 했다. 남은 시체는 개에게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포로들의 눈을 빼서 풀어주었다. 당연히 좋은 뜻은 아니었고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아시리아 군대의 잔혹성과 위험함을 널리 알리라는(...) 의미.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시리아는 이런 '''과격한 탄압 정책 때문에 망했다.''' 반란을 일으켜도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으니 피정복민들이 죽기살기로 아시리아에 저항하는 역효과를 낳았던 탓이 컸다. [[공성전]]도 흔하게 일어났다. 가장 흔하고 가장 싸게 먹히는 건 [[사다리]]였다. 하지만 사다리는 성벽에서 넘어지기 쉬우므로 일부러 화살로 보조를 해주었다. 결사대가 방패를 위로 하고 죽을둥살둥 올라가면 멀리서 궁수들이 보조해주는 식이었다. 그 외에 성벽을 아예 무너뜨리기도 했다. 전투 도중 벽에서 흙을 긁어내서 벽이 아예 무너지도록 만들었던 것. 네 개의 바퀴에 목재로 만든 [[공성추]]도 썼는데, 끄트머리에 금속 징을 붙인 거대한 통나무를 사용했다. 통나무는 물에 적신 가죽으로 덮어 화공에 대비했다. 공성추는 성문 뿐만 아니라 성벽에도 쓸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성벽은 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무른 진흙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당시에는 짚 끼워넣기처럼 성벽 보강 기술도 없었기에 공성추로 진흙 성벽도 충분히 깨뜨릴 수 있었던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